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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정치 인터뷰
장동혁, 文 정부의 방향...두고 볼 수 없다!
기사작성 : 2020-03-28 19:22:12
이용민 기자 yongmin3@daum.net

  

 ▲장동혁 미래통합당 유성구(갑) 국회의원 후보.

  [시사터치 이용민 기자] =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 장동혁 미래통합당 유성구(갑) 국회의원 후보가 자신의 삶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방향도 바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방향’은 무엇일까.

  장 후보는 가정법원 판사 시절에 비행청소년 문제로 판사로서의 한계를 느꼈다. 판결로써는 해결할 수 없는 청소년의 ‘결핍’ 문제를 입법으로서 해결하고 싶어 한다.

  장동혁 후보를 25일 만나 그가 왜 법복을 벗고 정치인의 길을 선택했는지, 그의 삶과 정치관, 앞으로 이루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들어봤다.

  Q. 고향과 학창 시절 등 자기소개를 해달라.

  A. 충남 보령시 웅천읍 대창리에서 태어났다. 산 밑에 있는 시골마을 중에서도 맨꼭대기다. 어린 시절부터 대학생 때까지 가정형편이 많이 안 좋았다. 그렇다 보니 다른 친구들은 대전이나 공주사대부고, 천안 등으로 갈 때 저는 대창리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공부를 많이 못했다. 형편이 어렵다 보니 대학까지 갈 수 있을까 싶어서다. 고 2 때 서울대를 간 우리 학교 선배가 학교에 와서 ‘서울대나 서울의 좋은 대학만 가면 과외하면서 충분히 혼자 대학을 다닐 수 있다’고 말해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다. 늦게 하다 보니 열심히는 해야 하는데,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을 가서 내리면 또 30분을 걸어 가야 우리 집이다. 이때부터 시간을 아끼려고 학교에서 잠을 자면서 공부했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가 아니라 교실 바닥에서 잤다. 아침이 되면 어머니가 도시락 3개를 가져다주시고, 저는 어머니에게 빈 도시락 3개를 드렸다. 그렇게 공부를 해서 대학에 진학하고,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게 됐다.

  학교는 대창초등학교, 웅천중학교, 대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 불어교육학과를 갔다. 사실 법조인이 꿈이었는데, 불어교육학과를 가다 보니 인생이 많이 복잡하게 됐다. 대학 2학년 되면서 가난한 형편에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하는데, 무엇을 하며 살까 고민했다. 법조인의 꿈으로 사법시험을 공부하려고 봤더니 과목이 너무 생소했다. 반면 행정고시 교육직렬을 봤더니 사범대에서 공부한 익숙한 과목이 몇 개 있었다. 행시는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에 2학년 때 시작해 3학년 때 1차, 4학년 때 2차, 3차까지 합격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며 겪는 큰 변화의 계기는 아주 사소한 데서 오는 것 같다. 제가 고등학생 때 같이 1, 2등을 겨루던 친구가 서울대를 도전했다가 안 되고 다른 학교 후기를 가서 군대 제대하고 다시 서울대 법대에 들어왔다. 그때 이미 저는 행시에 합격해서 졸업할 때였다. 당시 서울에 있는 동기들이 모여 저는 졸업한다고 축하하고, 그 친구는 다시 서울대 법대 들어왔다고 축하하며 자리를 같이 했다. 그때 저는 이미 고시까지 붙어서 가는데 친구는 이제 법대 와서 ‘고시가 그렇게 간단한 것도 아닌데 언제 하려나’ 속으로 교만한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잊고 살았는데, 어느 날 봤더니 그 친구가 사법시험에 붙었더라. 또 2년이 지나니까 그 친구가 판사가 됐다더라. 저는 필름을 되돌려 보기 시작했다. 내가 늦었다고 갑갑하게 생각했던 그 친구가 결국 내가 가고 싶었던 그 길을 가고 있었다. 반면, 나는 조금 쉬운 길을 선택해서 그래도 남들이 보기엔 뭔가 이뤘다고 보긴 하지만, 내가 가고 싶었던 길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계속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다시 하자.’해서 사표를 내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저는 젊은 친구들에게 항상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라고 말한다.

  고등학생 때 1년 재수하면 죽는 줄 알지만 사실 살다 보면 1년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등학생 때 서울대 법대를 떨어지면 과감하게 재수를 하던지, 아니면 다른 대학 법대를 갔었더라면, 어쨌든 지금보다 훨씬 더 먼저 법원에서 일을 했을 것이다. 또 법대가 아닌 사범대를 다녔어도, 그때 조금 힘들더라도 내가 하고 싶었던 사법시험을 도전했더라면 어쨌든 훨씬 빨리 법원에 있었을 것이다.

  고등학생 때 조금 빨리 가겠다고 내가 원하지 않던 길, 고시공부를 할 때도 조금 쉽고 빨리 가겠다고 내가 원하지 않았던 길을 가다 보니, 91년도에 행시 합격하고 다시 2001년도에 원하던 사시에 합격해서 결국 인생을 10년 돌아왔다. 그래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생각을 했다.

  Q. 그동안 어떤 일들을 해왔나?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A.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 있던 기간은 대전지방법원 가정지원(지금은 가정법원)에서 비행청소년에 대한 소년보호 사건을 하면서다. 그때가 판사로서 가장 답답하고 가슴 아프고, 제 열정을 쏟았던 시간이었다. 비행 청소년들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가정환경에 뭔가 결핍이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 아이들을 잘 달래고 이야기해서 다시 가정이나 사회로 되돌려보내도 그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시스템이 없으면 그 아이들은 다시 오더라. 1년에 3번씩 만나는 아이도 있었다. 제 앞에 와서 울며 ‘다시 나가면 판사님 그렇게 살지 않을게요’라며 돌아갔다가 다시 오면 그 애가 그때 말했던 게 거짓말이 아니라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맞아줄 따뜻한 가정도 없고, 부모도 없는데 어디에서 소속감을 느끼고 결핍을 채우겠나. 경제적 능력도 없다 보니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끼리 모여서 모텔에서 집단생활하고, 돈이 부족하면 애들 불러다가 (못된 짓)해서 돈을 구해야 하는 그 생활의 반복이 된다.

  그래서 비행청소년 문제는 내가 재판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그 아이들의 결핍을 채워줘야 한다. 그 결핍은 대부분 부모의 이혼으로부터 온다. 부모들이 이혼할 때는 건강한 이혼을 하지 않는다. 서로 감정이 깊어질 대로 깊어져 양육비도 안 주고 애도 안 보여준다면서 서로 싸우고 결국 나중에 이 아이는 어느 누구에게도 속하지 못한다. 그 아이는 그냥 그렇게 결핍을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는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 부모가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그걸 채워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2년 가까이 이를 경험하면서 아이들에 대한 애정은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을 보며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그때 재판하며 고뇌했던 것들이 재 판사 생활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안타깝기도 하고 판사로서 한계를 느꼈던 부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런 것들이 정치를 통해 해결될 것 같다. 사법부는 소극적인 성격이다. 사회에서 이를 채워주라고 판사가 명령할 수도 없고, 사회적 결핍이 채워지지 않았다고 모두 무죄라고 할 수도 없다. 민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사태로로 인해 월세도 못 내고 장사가 안돼 쫒겨나야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민사적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고 판사가 코로나 때문에 그런거니까 돈 안 줘도 된다고 판결할 수도 없다. 판사가 해결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입법이다. 행정부는 그 법이 있어야 집행을 한다. 그런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게 남들은 정치라고 표현하지만 입법이다. 입법이라는 행위, 정치라고 하면 매일 치고받고 싸우는 걸로 인식하시기 때문에 입법이라 표현하고, 이 활동을 통해 사법활동에서 느꼈던 한계를 극복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Q. 정치를 하게 된 배경...?

  A. 정치를 하게 된 데 신앙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저는 교회를 6살 때부터 지금까지 46년간 다니고 있다. 아내도 서울에 있는 교회에서 만났다. 저는 매일 아침 중요한 일이 끝나면 캠프 식구들과 다 같이 말씀을 듣고, 기도 하고 오늘을 시작한다. 작년 4월부터 신앙적으로 변화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정치를 시작하고 또 보수정당을 선택하는데 일정 부분 영항을 미쳤다. 신앙에서 제가 정치인으로서 해야 할 소명 중 일부를 찾았다. 이 정권에서 하는 여러 정책들 중 기독교적인 가치에 반하는 정책들도 있다. 스스로 성경 공부를 하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다. 물론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법과 질서를 바로 세우고, 유성을 위해, 충청을 위해, 대한민국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생각도 했고, 그러면서도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이런 가치들을 지켜내야 한다고 결심한 데에 신앙적인 영향도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정권의 방향성이다.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본 가치가 무너지고 있다. 더 전진하려 하는데, 여기서 막아서고 다시 우리 헌법의 기본가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더 저쪽으로 간 나라를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또 유성을 중심으로 대전의 힘을 키우고 강한 충청을 만들고 싶다. 충청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대학생들이 와서 왜 대전, 충청은 다른 곳보다 일자리가 부족하냐고 하는데 이것은 한마디로 기울어졌다는 것이다. 소외받거나 약하다는 것인데, 이를 바로잡는데 역할을 하고 싶다.

  Q. 국회의원이 된다면 국가와 대전 유성구(갑)를 위해 어떤 일들을 하시겠나?

  A. 국가를 위해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더 나아가 사회 전체의 법과 원칙이 존중되면서 객관성과 공정성이 담보되는 방향으로 변하도록 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교육제도다. 지금의 대입, 로스쿨, 의학전문대학원, 특목고 입시에서 부모의 능력이 그 결과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데 많은 사람들이 불만과 의혹을 갖고 있고, 일정 부분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교육시스템이 자신의 능력으로 정정당당하게 겨뤄 다른 어떤 요인도 개입되지 않을 수 있도록 공정성과 객관성을 담보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이게 가장 해보고 싶은 것 중 하나다.

  사법개혁과 관련해서는, 정치의 힘이 사법부로 자꾸 들어오려 하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내야 한다. 특히, 사법농단 사태라는 것을 통해 법원은 이미 상당히 정치화됐다. 정치화됐다는 것은 정치권의 영향을 받고 눈치를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법농단을 통해 이제는 법원 내부에서 색깔을 갖고 편으로 나뉘어 갈등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중요 정치인이나 사건이 있으면, 법조인에게 가서 구속 사유가 될지를 묻는 게 아니라 영장전담판사가 누구인지를 관심 갖는다. 그렇다면 이미 법원 내에서 색깔이나 진영논리로 균열이 있기 시작했고, 그것이 판결이나 어떤 결정에도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상태가 됐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우려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법원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 정치권에서 자꾸 법원에 손을 대다 보니까 법원 조직이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사법행정위원회를 하면서 국회의원도 각 정당에서 추천하는 사람을 넣겠다고 한다. 위원회라 한 사람이 결정하는 게 아니니 괜찮다고 하지만 그 발상 자체가 매우 위험하다. 정당에서 추천한 사람은 그 정당의 생각과 이익, 정책방향을 대변한다. 위원회가 토론을 통해 다수결로 결정하니까 괜찮다는 것은 매우 순진하고 위험한 생각이다. 이런 게 자꾸 (사법부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유성을 위해서는, 가장 큰 문제가 구청장, 시장, 국회의원 모두 민주당이다. 그런데 어느 사업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다. 장대교차로 문제도 계속 얘기하다 평면으로 바뀌었다. 왜 그런지에 대해 주민 아무도 수긍하지 못한다. 교도소 이전, 도안대로, 복합터미널과 서남부스포츠타운을 한다고 하더니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구청장, 국회의원, 시장이면 힘을 합쳐 반대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잘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아무도 왜 안 되는지 왜 잘못되고 있는지, 왜 거꾸로 가고 있는지 비판하고 감시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번에 반드시 국회의원만이라도 미래통합당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감시하고 안 되는 것이 되도록 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공약을 다 말할 순 없지만 이런 것을 통해 강한 유성을 만들고, 교육 1번지 유성을 만들겠다는 게 핵심이다.

  Q. 경쟁 상대인 더불어민주당 조승래 후보의 장점과 단점을 꼽는다면?

  A. 장점이 많은 분이다. 그리고 본회의와 상임위 출석률, 법안 발의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지역구인 유성을 위해서는 과연 얼마큼 일했는지는 의문이다. 장점은 4년간 지역 유권자들과 소통하려고 많이 노력해왔고, 의정활동도 많이 해오셨으며, 개인적으로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Q. 마지막으로 유성구(갑) 유권자들에게 한마디...

  A. "진짜가 나타났다." 진짜가 나타났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넌 너무 교만한 거 아니냐, 그럼 지금까지 다 가짜냐’ 그러기도 하는데, 저는 진짜가 나타났다고 했지 진짜가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한적은 없다. 제가 진짜라고 하는 것은 겸허하게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늘 들을 준비가 돼있고, 변치 않는 정치인이 될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는 의미에서 저는 ‘진짜가 나타났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시민의 소리를 듣고, 국민의 소리를 듣고, 끝까지 변치 않는 정치인이 되겠다.

/yongmin3@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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